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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칼럼] 잠자고 있던 ‘공정 이용’(Fair Use) 조항을 깨우자!

  • 등록일 : 2024-06-18
  • 조회수 : 16
  • 작성자 : 대학신문사

[전주대신문 제940호 9면, 업로드일: 2024년 6월 19일(수)] 


잠자고 있던 ‘공정 이용’(Fair Use) 조항을 깨우자!


박문칠 교수

(문화융합대학 영화방송학과)


 10년 전, 처음 만든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마이 플레이스>가 북미 최대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캐나다 핫닥스(Hot Docs) 영화제에 초청이 되었을 때,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젊은 영국 감독이 헐리우드 청춘 영화들의 주요 장면들을 편집해서 작품을 만들었는데, 원 저작자의 허락은 물론 돈 한 푼 내지 않고 영화 소스를 가져다 썼다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미국에서는 전혀 저작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미국 저작권법에 있는 ‘공정이용’(fair use) 조항 때문이다.

 지적재산권의 선진국인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수도 있겠다. 특히 한국처럼 지난 20여 년간 타인의 저작물을 무단 도용하는 것은 절도와 같이 심각한 범죄라고 교육을 해온 사회에서는 더더욱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작권법의 기본 취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저작권자의 권리보장도 중요하게 고려되지만 동시에 사회 전체의 이익과의 균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작권법 제1조에 명시된 법의 목적을 살펴보자. “이 법은 저작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취지에서부터 ‘공정한 이용’이 언급되고 한 사회의 문화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한 사회의 학문과 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앞선 사람들의 저작물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이용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학자가 타인의 논문을 인용할 때마다 허락을 맡고 비용을 지불해야 하면 과연 학문적 발전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을까? 기자가 기사를 쓰면서 사회지도층의 발언을 인용할 때마다 허락을 맡고 비용을 지불해야 하면 제대로 된 언론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이렇듯 이미 우리 주변에는 우리 문화의 발전을 위해 저작물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는 예외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의 저작물이지만 사회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여 저작권 등록을 하지 않고,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듯 한 사회의 지적 공유지대가 넓어질수록 그 자원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가능성은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문제의식 하에서 ‘공정 이용’ 조항이 있는 것이다. 한국도 2011년부터 저작권법 35조 5항에 ‘공정 이용’ 조항이 신설되었다. 앞서 말한 영국청년이 만든 영화가 사실은 한국에서도 이미 2011년부터 합법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용이 ‘공정한’(fair)한 이용인가? 앞서 이 조항을 적용해 온 미국의 사례를 참고해 본다면 중요한 것은 원저작물을 2차적으로 이용하는 목적이 기존 목적과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원저작물을 이용하는 정도가 적절한가, 여부이다. 여기서 중요한 판단기준은 결국 원저작물의 시장가치를 얼마나 잠식했는가에 있다. 앞서 말한 영국 감독은 수많은 헐리우드 청춘영화를 관람하고 분석한 결과, 청춘 영화에 꼭 등장하는 캐릭터 유형, 스토리 전개 방식 등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영화에 담았다. 즉, 원저작물의 이용 목적(청춘영화 관람)과는 다르게 새로운 관점과 가치를 창조해 낸 것이다. 또한 영화 전체를 통째로 유통시키는 불법 다운로드와는 다르게 원저작물의 일부만 인용했기 때문에 과도한 사용이라 볼 수 없고 해당 영화의 시장 가치를 침해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이런 요건들을 모두 만족시켰기 때문에 공정 이용에 해당된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저작권자의 배타적 권리만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풍토에서 벗어나 잠자고 있던 ‘공정 이용’ 조항을 깨울 때이다. ‘공정 이용’에 대한 광범위한 교육을 통해 더 많은 창작자들이 고소 고발의 두려움이나 천문학적 비용 부담에 대한 염려 없이 기존 저작물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면 이는 예술가들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보다 다양하고 풍요로운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인용 가능(단, 인용시 출처 표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