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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선교

[쉽게 읽는 성경] 나의 이름을 부르는 존재

  • 등록일 : 2023-11-20
  • 조회수 : 174
  • 작성자 : 대학신문사

[전주대신문 제935호 11면, 업로드일: 2023년 11월 22일(수)]


<쉽게 읽는 성경> ⑨


  나의 이름을 부르는 존재


조재천 교수

(선교신학대학원)

  

종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하지만 그 긴 역사 동안 신앙을 사적이고 개인적인 무엇으로 여기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서구에서 흔히 ‘근대’라고 일컬어지는 16세기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인간 정신이 개인의 자유와 가치를 발견하고 긍정하게 된 바로 그 시기 신앙에 있어서도 개인이 주인공으로 나서게 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생각하는 나’에 인식의 확실성을 정초한 데카르트적 명제가 지배하던 시기에 기독교 역시 신 앞에서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실존과 구원을 중심에 두게 되었다. 종교개혁에 관한 한루터와 깔뱅, 그리고 수많은 개혁자들이 신 앞에서 각 개인의 자유롭고 다채로운 신앙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창했다. 적어도 개신교인들에게 진리의 기준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회의 전통과 규범이 아니라 각 개인이 깨닫고 경험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었다. 하나님이 각개인에게 신앙의 양심과 자유를 허락하셨다는 믿음이 종교개혁과 이후 기독교 신학의 토대였다. 


19세기 말 극동의 한반도에 개신교가 전래될 때 그것은 이미 깊이 개인화된 종교였다. 전근대에서 근대에로의 급속한 전환기에 우리 민족에게 기독교는 축복이자 위협이었다. 한편으로 완전히 새로운 인간상을 정립해 주는 평등과 해방의 복음으로 다가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적 계층 사회와 가족이라는 집단적 토대를 흔드는 전복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처음 절반을 식민 피지배와 동족 상잔의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보내는 동안 한국의 전통적 신분사회, 씨족 기반의 유교적 질서는 빠르게 해체되었다. 그 과정에 굳이 기독교를 주요한 동인으로 지목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제국주의 수탈과 전쟁이 가져온 물질적, 정신적 폐허로부터 생존해야 했던 개인들에게 사적 종교, 개인 구원의 신앙으로서 기독교는 현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성서가 써진 시대에는 혈연과 지역을 기반으로 한 민족과 집단의 정체성이 개인의 정체성보다 우선되었다. 구약성서에서 구원이란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 소속되는 것이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개인들은 하나님과 언약 체결의 파트너였다. 그러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각각 그들의 가족, 후손, 민족, 나라의 대표자로서 그렇게 했다. 여러 언약 중에서도 “거룩한 나라”라는 이스라엘 정체성의 핵심을 형성해 준 모세 언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출애굽기 20장 5-6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함이든 불신실함이든 그 댓가는 당사자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집단주의와 연대성의 신학이 서서히 느슨해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이스라엘의 두 왕국이 모두 망하고 앗시리아와 바벨론으로 강제로 이주당해 살아가던 때였다. 예언자 에스겔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더 이상 민족과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각 개인으로서 대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는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아직도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하는 속담을 입에 담고 있느냐?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너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다시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속담을 입에 담지 못할 것이다. 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영혼이나 아들의 영혼이 똑같이 나의 것이다. ... 아들은 아버지의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가 아들의 죄에 대한 벌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의인의 의도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다.”(에스겔 18:2-4, 20절). 각 개인이 자신의 의로움과 악함에 책임이 있다는 원칙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고 예배하는 신앙에 있어서 개인의 위치가 확보된 것이다. 


천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형성된 구약 성서의 공동체적 이상이 하루 아침에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포로기 이후 성전이 재건되고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전쟁과 재난, 외세의 지배가 이어지던 제2성전기에 유대인들은 ‘묵시’(아포칼립시스)라는 장르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메시아의 도래를 꿈꿨다. 그 대망의 시기에 나사렛 예수가 등장했을 때 예수 자신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열두 지파를 이어받은 열두 제자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언약 백성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예수의 많은 가르침 중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각자의 고유한 인격과 능력, 상황대로 인정하고, 부르시고, 구원하신다는 실존적 구원의 메시지 또한 분명했다. 그의 공적 생애 동안 예수를 만났던 개인들은 각자의 처지와 성격대로, 각자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고유한 언어로 예수와 대화했다. 그들은 자기를 어떤 고정된 기대나 기준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 대해 주시는 구원자를 예수에게서 발견했다. 


한 비유적 이야기에서 예수는 유대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배경으로 자신을 ‘목자’에,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양’에 빗댄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 양들을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0장 3-4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불러주시는 체험을 하곤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깊은 고민과 꿈,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 감정과 욕망을 고스란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신, 그분과 인격적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삶이 기독교 신앙의 한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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