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비주얼

신앙과 선교

[쉽게 읽는 성경] 땅을 위한 소금, 세상을 위한 빛

  • 등록일 : 2023-10-24
  • 조회수 : 108
  • 작성자 : 대학신문사

[전주대신문 제934호 11면, 업로드일: 2023년 10월 25일(수)]


<쉽게 읽는 성경> ⑧


  땅을 위한 소금, 세상을 위한 빛


조재천 교수

(선교신학대학원)

  

 예수의 가르침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산상수훈의 첫머리에는 이른바 ‘복 선언’(the Beatitudes)이 나온다. 여덟 가지 혹은 아홉 가지 복의 선언은 논증적이라기보다 시적이고 예언적이다. 지금 이곳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거칠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런 제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예수는 십분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종말에 ‘하늘’에서 지금 겪는 모든 아픔이 환희와 풍성함으로 보상되리라고 약속한다. 복 선언(5:1-12)이 교향곡의 서곡이라면,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빛과 소금’ 말씀(5:13-16)은 교향곡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 선율이라 할 수 있다. 5장 17절부터 7장 12절까지 제시될 다양한 윤리적 삶의 원리와 실천 방안의 저변을 흐르는 물줄기가 바로 이 말씀이다. 따라서 제자도 혹은 제자의 정체성에 관한 이 두 가지 은유적 선언(“너희는 ~이다”)을 너무 구체적이고 특정한 규범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이 놓인 문맥을 염두에 두고, 많은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포괄적인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두 말씀은 대구를 이룬다. 성격이 완전히 다른 별개의 두 가르침이 아니다. 서로 비슷하거나 대조를 이루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있다. ‘빛과 소금’이라는 우리말 관용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예수께서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라는 선언이다. 이 첫 번째 말씀이 두 번째 말씀(“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보다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데, 더 짧고 함축적이기 때문이다. “땅의”라는 속격 명사는 바로 앞 12절 “하늘에서”와 대조를 이룬다. 평화와 기쁨, 위로와 풍성함이 있는 ‘하늘’과 달리, 결핍과 고통, 박해와 외로움이 있는 곳, 그곳이 ‘땅’이다. 이 척박한 땅에, 그리고 이 땅을 위해서 제자는 소금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땅에서 소금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주석가들의 제안은 많고 다양하다. 부패를 막는 방부제, 맛을 내는 조미료(욥 6:6), 희생제물에 뿌려지는 거룩한 헌신(레 2:13), 변하지 않는 언약의 상징(민 18:19), 거룩함의 상징(출 30:35), 인간 생존의 필수품(집회서 39:26), 왕이 내리는 급여를 받는 신하의 충성심(에 4:14), 평화(막 9:50), 적절한 언어(골 4:5), 현자들의 지혜 등. 이것들 중 꼭 하나만 집어야 할 이유는 없다. 앞서 1-12절에 복의 조건으로 언급된 몇 가지 요소가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마음의 깨끗함’(8절), ‘평화를 만드는 일’(9절), 혹은 ‘의를 위해 받는 박해’(10절) 등을 뜻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보다 세상에 필요한 존재, 세상을 섬기고 유익하게 하는 존재로서 다양한 역할이 ‘소금’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낫다. 마르틴 루터가 깨달은 것처럼, 소금은 소금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은 더 난해하다. 땅의 소금, 땅을 위한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그것을 다시 짜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 소금이 짠맛을 잃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 고대 사회에서 소금은 증발을 통해서 얻어지거나 사해 인근에서 채취된 암염을 통해 얻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채취된 소금은 애초에 염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다. 또 소금을 보관하면서 다른 물질이나 불순물들과 섞이기도 했다. 즉, 현실적으로 소금의 염도가 아주 낮아져서 쓸모없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둘째, 그런 경우가 실제로 얼마나 흔했는지와는 별개로, 이 말씀을 비유로 이해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예수는 여기서 제자가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사회에서 그에게 기대된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경고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제자됨의 진면목은 예배당이나 자신만의 홀로 있는 시간에만 나타나서는 안 된다. 땅의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제자는 소금처럼 행동해야 한다. 또한 이 구절의 비유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그리스어 원문이 도움이 된다. ‘짠맛을 잃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모라이노”의 어원적 의미는 ‘어리석게 되다, 둔해지다’이다. 그렇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이란, 예수의 제자인데도 아닌 척, 모호하고 어중간한 말과 행동으로 일관하는 제자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 제자가 맞이할 운명, ‘밖으로 던져짐’은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분리되는 엄중한 심판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선언,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의 의미는 첫 번째 선언의 빛 아래에서 찾아져야 한다.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한다”,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은 예수를 믿는 신앙이 자기만족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와 이웃, 세상과 문화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땅의 소금이 땅을 위한 소금이듯이, 세상의 빛도 세상을 위한 빛이어야 한다.

 16절에 의하면 ‘빛’은 ‘선한 행실’을 가리킨다. 무엇이 선한 행실인지는 각 사람의 처한 상황에서 분별되어야 한다. 단, 사람들이 그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정도로 명확하게 복음적이고 일관된 행실일 것이다.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의 근거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사람들이 그것을 순수한 신앙적 동기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누군가를 전도할 목적으로 호의를 베푸는 일은 그 자체로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여기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바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어떤 전략이나 방책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녹아든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삶의 내용이다.

 소금과 빛으로서 제자의 정체성은 어쩌면 전주대학교와 같은 기독교 대학 내에서 기독교수, 기독학생으로서 우리의 모습에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른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라는 한 초대 교회의 문서에서 그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몸 안에 영혼이 존재하듯,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 존재해야 한다.”



* 인용 가능(단, 인용시 출처 표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