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연구단] 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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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06-10 조회수 271 작성자 한국고전학연구소 |
첨부 : 20240319.논문.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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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3070240 |
국문초록 초대 조선 대목구장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Barthélémy Bruguière, 1792-1835) 주교의 생애와 행적에서 연구의 주제로 삼아야 할 사항들은 많다. 시암 대목구 선교사로서 방콕에서 활동하던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 선교지로 다시 파견되기를 희망하였다. 그의 선택은 파리외방전교회 내부에서는 다양한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소명을 다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 대목구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이 글은 고(故) 최석우(1922-2009) 몬시뇰과 고(故) 이영춘(1960-2012) 신부의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하면서 몇 가지 세부 사항에 관한 의문들을 해명하고자 한다. 첫째, 시암 대목구 선교사로 파견된 브뤼기에르 신부는 언제 어떤 경로로 조선 선교지를 알게 되었는가?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으로 가겠다고 하였을 때는 이미 조선과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언제 누구로부터 어떤 내용으로 조선 선교지를 알게 되었는지를 밝히면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한 계기를 이해하는 단서를 마련할 수 있다. 둘째, 파리 본부는 포교성성과의 교섭 경위를 언제 어떤 내용으로 회원들에게 알렸나? 파리 본부에서 각 선교지에 보낸 서한에 조선 선교지 문제가 어떻게 실려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셋째, 초대 조선 대목구장의 자격으로 마카오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신설 대목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였나?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 사이에서는 조선 선교지를 맡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런 반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로마와 파리로 편지를 보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기울인 노력은 조선 대목구가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상의 의문들을 풀기 위하여 이 논문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에 소장된 문서 자료 제63권(Volume 63, Séminaire 1823-1839)을 활용하였다. 이 자료는 낱장 서한들을 묶은 문서철이 아니라 가로 20㎝, 세로 32㎝의 크기에 168면으로 된 공책이다. 여기에는 1823년부터 1839년까지 파리 본부에서 신학교 지도자의 명의로 각 선교지에 보내는 서한의 초안이 적혀 있다. 그 가운데에는 파리 본부에서 조선 선교지 문제를 놓고 포교성성과 교섭을 벌인 경위를 알리는 공동 서한, 로마에서 조선 대목구가 설정된 이후에 시암 대목구장 플로랑(Esprit-Marie Florens, 1762-1834) 주교, 브뤼기에르 주교, 마카오 대표부의 르그레주아(Pierre Legrégeois, 1801-1866) 신부에게 보낸 서한들이 들어 있다. 이 서한들에는 당시 파리 본부의 신학교 지도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이 서한들을 분석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활동과 그 의의를 밝히고자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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