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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을 창간하며

『공존의 인간학』은 현대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 담론을 생산·공유하는 학문의 장을 마련하려고 창간되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은 서구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발전 모델로 하는 성장 이데올로기를 통해 급속히 발전해 왔고, 이제는 더 이상 따라가야 할 발전 모델이 없는 선도적 지위에 올랐습니다. 급속한 세계화와 정보화로 개인 간 소통이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면서 20세기를 지배했던 서구적 보편성의 위상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개별 지역의 특이성이 소통하고 연대하는 문화접변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지역 문화들은 주권국가가 구성해 왔던 문화 영토의 구심력에서 벗어나 비체계적이고 비균질적인 특이성으로 존재하며,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추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성장시대와 4차 산업혁명시대의 징후들이 일상생활의 구조를 전복시킬 것이라고 해석될수록 사회적 갈등과 충돌 현상은 증폭되고,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미래에 대한 기대 지평이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대 지평이 상실된 시대의 인문학은 ‘과거’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혁명의 시대 프랑스 지식인들은 그리스 민주정을 소환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기존 질서가 와해되었을 때, 조선 지식인들은 중국 주周나라를 소환했습니다. 교범이 될 모델이나 경험이 사라졌을 때, ‘과거’는 새로운 지평을 모색할 수 있는 추체험의 보고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고전의 해석’ 행위는 현재까지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의 해석이 모두 긍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소환’이란 인문학적 행위가 문화 영토의 구성원이 공유한 질서관념ethos에 기초하여 이루어질 때, 갈등과 충돌을 최소화하면서 새로운 기대 지평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해 왔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 이러한 ‘과거의 소환’ 행위는 기존 질서 또는 기존 체제의 유지에 기여해 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따라서 고전의 해석 행위가 현대사회의 문제를 비판하고, 대안적 사유를 도출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다양하고 열린 학문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한국 현대사회가 유교문화를 전통으로 승인하고 있는 이상 우리가 해석해야 할 고전은 일차적으로 유교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5백 년 이상 사회의 구성 원리로 작동한 유교의 해체는 한국인의 에토스에 균열을 가져왔고 급격한 자본주의 산업화에 의한 가족의 해체로 이어졌습니다. 1990년 9%에 지나지 않았던 1인 가구는 2016년 27.2%로 증가했으며, 26.1%를 차지한 2인 가구를 포함하면 53%의 가구가 소형 가구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가족의 해체 현상은 사회·경제·정치 전반에서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화를 생산하기도 합니다.

지난 백 년 동안 한국처럼 빠른 속도로 발전을 지속해 온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타율적 근대화 과정을 거치고 분단국가가 되면서 한국 사회에서는 오로지 ‘근대화’가 최상의 가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시기 한국 전통의 가치는 근대화를 위해 왜곡되거나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전통이 근대의 적으로 평가되면서 유교문화는 통치와 지배의 수단으로서만 강조되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갖추어야 하는 심성론은 배제되었고 국가와 지배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만이 강조되었으며, ‘한국적 가치’를 내세운 유신維新은 획일적이고 균일한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유교의 본질을 차용했습니다. 그리고 반인륜적 범죄와 반사회적 현상의 평가에는 전통적 유교의 감성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배 권력에 의한 유교문화의 왜곡과 감성적 유교문화 인식이 혼재하면서 사회를 구성하는 가족의 해체와 공동체 의식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기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공존의 인간학』은 공동체로서 인간의 관계성을 재정립하기 위한 학제간 연구를 지향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생성하는 4차 산업혁명의 징후들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현대사회의 문제에 대안을 도출할 수 있는 연구들이 이 학술지를 통해 소통되고, 확산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성과들이 한국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고, 미래 사회에서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를 소망합니다.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소장 변주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