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연구단] 식민지 조선의 유림과 일본 사문회(斯文會)의 교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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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02-26 조회수 437 작성자 한국고전학연구소 |
첨부 : 20240104.논문.식민지 조선의 유림과 일본 사문회(斯文會)의 교류.pd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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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3050989 |
국문초록 본 연구는 근대 일본의 관제 유림단체인 사문회와 식민지 조선유림의 교류를 살펴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조선총독부는 일찍이 식민지 조선의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조선유림의 유시마성당 참배와 사문회 방문을 기획했다. 일본에 간 조선유림들은 사문회를 방문하고 유시마성당을 참배한 후에는 사문회 회원으로부터 사문회 및 일본유학에 관한 강연을 들어야 했다. 3·1운동 후, 조선총독부는 사문회 인사들을 조선에 초청했다. 그들은 문묘 석전에 참석한 후, 경학원이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은 일제의 식민지 조선 지배와 통치방향에 관한 것으로, 일본 국가주의에 입각한 일본유교를 강조한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경학원잡지≫에 수록되어 전국의 유림들에게 널리 배포되어 읽혔다. 한편, ≪사문≫에도 조선유림의 글이 실렸는데, ≪사문≫에 반영된 조선유림의 모습은 피식민의 모습이자 교화의 대상일 뿐이었다.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된 유시마성당이 재건되면서 1935년 사문회에서는 성당재건기념 유도대회와 공자제전을 개최했다. 유도대회는 황도유학의 이론화와 선전을 통해 군국주의를 고취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유도대회에는 조선측 인사도 참여했는데, 이들은 경학원의 주요 구성원이자 사문회 회원, 공자의 후손, 1932년에 조직된 유림단체인 조선유교회의 대표자였다. 그리고 상업종사자, 요리종사자, 일본 유학 경험자 등 전통적인 유림의 범주에서 벗어난 인물들의 참가도 있었다. 이들의 등장은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유림의 성격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음을 시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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